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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순의 길거리 사회학] 공론화는 남발보다 절제가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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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퇴진한 이후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시민참여가 만병치료제는 아니다. /더팩트 DB
촛불시위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퇴진한 이후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시민참여가 만병치료제는 아니다. /더팩트 DB
촛불시위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퇴진한 이후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시민참여가 만병치료제는 아니다. /더팩트 DB

"공론화보다 유능한 대리인이 필요한 시대다"[더팩트 | 임태순 칼럼니스트] 한 번 스텝이 꼬이니 계속 엉킨다. 현재 중학교 3학년에 적용되는 2022학년도 대입 제도 개편안 이야기다. 교육부는 대입 제도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세부 시행방안은 대통령 자문기구인 국가교육회의에 넘긴다고 했다. 그러자 국가교육회의는 공론화 등을 통해 오는 8월 초까지 최종 권고안을 마련하겠다고 답했다.

이를 위해 대입제도 개편 특별위원회(대입특위), 공론화 위원회(공론화위) 등 2개의 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했다. '대입특위'는 여러 가지 쟁점사항 중에서 어떤 것을 공론화 대상으로 정할지 등을 결정하고, '공론화위'는 수학능력시험 평가 방법(절대‧상대평가, 원점수제도) 등이 포함된 5~6가지 안을 국민 토론에 부쳐 최종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위임과 공론화를 통해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교육부는 국가교육회의에, 국가교육회의는 대입특위와 공론화위 등 하부 기관에 핑퐁치기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니 계속 꼬이기만 한다.

공론화는 신고리 원자력발전 5.6호기 건설중단여부를 결정할 때 도입해서 호평을 받았다. 이해관계자가 아니라 시민대표단이 원전에 대해 학습과 토론을 거쳐 내용을 충분히 숙지한 뒤 공론조사방식으로 의견을 수렴해 합리적으로 의사결정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론화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단순한 찬‧반 여론조사와 달리 시민들이 현안에 대해 공부를 한 뒤 의사결정을 한다는 점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갈등해결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론화가 우리 사회 갈등을 일거에 해소해주는 요술방망이는 아니다. 공론화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라는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적지 않다. 우선 공론화를 위한 사전 준비과정과 시민대표단 선정 등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신속한 의사결정을 해야 할 때는 부적합하다. 또 사안이 복잡할 경우에는 공론으로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 이번 대입 제도 개편안이 그렇다. 선발의 공정성과 수월성, 고교정상화 등 여러 가지가 맞물려 있어 시민대표단이 과연 학습과 토론을 통해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고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회는 다원화, 전문화되는 추세여서 일반인들의 상식에 기반을 둔 공론(公論)을 끌어내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전문가의 전문적 식견과 판단이 요구돼 공론의 영역이 좁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는 반대로 공론화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대법원장은 최근 헌법재판관 지명도 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결정하도록 내규를 바꾸겠다고 했다. 일견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위원회 위원 인선에 대법원장의 의중이 반영된다는 점에서 옥상옥이라고 할 수 있다. 책임지지 않으려 위원회를 방패로 삼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촛불시위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퇴진한 이후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국민투표로 선출한 대통령을 촛불시위로 무너뜨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시민참여가 만병치료제는 아니다. 그러기에는 사회가 너무 비대해졌고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또 시민참여가 항상 봇물처럼 넘치는 것도 아니다. 사전투표제도를 도입할 정도로 낮은 투표율이 이를 말해준다. 매사에 시민들이 나서면 그 사회는 비정상적이다. 그렇게 되면 피곤한 건 시민들이다.

시민들의 참여보다 대리인들이 운영하는 사회가 정상적이고 더 잘 작동한다. 공무는 공무원, 법률서비스는 판사‧검사‧변호사, 정치는 국회의원 등 대리인들에게 맡기고 이들을 잘 부리면 된다. 공연히 시민참여니 공론화니 해서 덧나게 할 필요가 없다. 공론화가 남발되면 공론(公論)이 아니라 공론(空論)만이 넘치게 된다. 공론화보다 유능한 대리인이 필요한 시대다. 공론화는 꼭 필요한 곳에 엄격히 사용되도록 절제되어야 한다.

thefact@tf.co.kr

원문 출처 [임태순의 길거리 사회학] 공론화는 남발보다 절제가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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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순의 길거리 사회학] 주객이 전도된 교육부와 국가교육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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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행정의 주체이자 정책집행기구인 교육부가 수시와 정시 비율 조정 등이 포함된 2022학년도 대학 입시 제도 개편안을 국가교육회의에 넘기겠다고한 것은 주객전도의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다. 사진은 2018 대학수학능력시험 현장./더팩트DB
교육행정의 주체이자 정책집행기구인 교육부가 수시와 정시 비율 조정 등이 포함된 2022학년도 대학 입시 제도 개편안을 국가교육회의에 넘기겠다고한 것은 주객전도의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다. 사진은 2018 대학수학능력시험 현장./더팩트DB
교육행정의 주체이자 정책집행기구인 교육부가 수시와 정시 비율 조정 등이 포함된 2022학년도 대학 입시 제도 개편안을 국가교육회의에 넘기겠다고한 것은 '주객전도'의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다. 사진은 2018 대학수학능력시험 현장./더팩트DB

[더팩트|임태순 칼럼니스트] 김영삼 대통령 시절 취재기자로 경제부처를 출입했다. 장관은 S대 교수 출신으로, 대선 후보시절부터 경제에 대해 자문을 해준 멘토였다. 그는 교수였을 때에는 경제현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혔지만 장관이 되고 나선 말을 아꼈다.

정책과 관련된 질문을 하면 늘 “검토하겠다”고 답해 ‘검토장관’이란 별명이 붙었다. 그가 신중모드로 바뀐 것은 자신의 말 한마디에 따라 기업이나 가게 등 경제주체에 미치는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교수의 말은 하나의 의견에 불과하고 책임도 크지 않지만 장관의 말은 정책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무게감이 다르다.

이보다 앞선 노태우 정부 시절 사회부처를 출입할 때에는 언론인 출신 장관을 만났다. 이 장관은 대부분의 실무는 실, 국장들에게 맡기고 거기에 따른 책임도 자신이 지겠다고 했다. 대신 까다롭고 민감한 문제는 자신이 결정할 테니 고민하지 말고 갖고 오라고 했다. 담당부처 공무원들은 아주 좋아했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려 잘해야 본전인 정책도 아래 사람에게 미루지 않고 교통정리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국실장들에게 업무를 대폭 위임해 시간 여유도 많았다. 그래서 장관실에 들르면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반면 앞에 말한 경제부처 장관은 항상 바빴다. 기업이나 관련 기관 등 외부행사가 많은 데다 장관 부속실에는 밀린 결제서류가 쌓여 있었다. 그래서 장관이 행사를 마치고 과천 청사로 들어오면 결제를 받거나 진행사항을 보고하기 위해 들른 직원들이 장사진을 쳤다.

최근 TV 저녁뉴스에서 교육부가 발표하는 2022학년도 대학 입시 제도 개편안을 시청했다. 수시와 정시 비율 조정, 수시와 정시 선발시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의 평가방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 등 하나같이 수험생과 학부모들에겐 민감한 사안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결정된 것은 하나도 없고 여러 가지 방안을 국가교육회의에 넘기겠다고 했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들었다. 교육행정의 주체이자 정책집행기구인 교육부가 자문기구에 결정을 떠넘긴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신문을 보니 예상대로 대부분 비판일색이었다. ‘대입 개편안 국민에게 또 미뤘다’, ‘던져놓고 빠진 교육부’ 등.

교육부는 중요한 입시정책을 한 번 더 공론화 과정을 거치는 게 뭐가 나쁘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현재 중3을 대상으로 한 새 입시정책은 지난해 수능 절대평가 도입방침이 논란이 된 이후 근 1년 가까이 논의돼 온 것이라 한다. 그 정도면 결코 부족한 시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또 국가교육회의가 복잡한 입시정책을 쾌도난마처럼 정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국가교육회의에 소속된 인사들의 면모를 보니 대표성은 있지만 개별 사안에 대한 전문성은 떨어지기 때문이다.

교육정책, 특히 입시정책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란 어렵다. 워낙 많은 게 얽히고 섥혀 있기 때문이다. 학생 선발을 공정하게 해야 하지만 대학은 조금이라도 뛰어난 학생을 선발하려 한다. 입시위주의 수업방식은 학교 교육 정상화와 충돌을 빚고 도농간의 교육격차도 해소해야 한다. 이를 잘 수렴해서 학생, 학부모, 고교, 대학 등 모두를 충족시키는 입시정책을 만들어내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동안 입시정책을 여러 번 수정해온 것이 이를 말해준다.

공론화가 나쁜 것은 아니다. 여론을 수렴하는 측면에선 긍정적이다. 그러나 부작용도 적지 않다. 시간이 걸리고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결정을 미루고 마찰이 심화될 수도 있다. 특히 이번 입시정책처럼 선택지가 많은 사안은 더욱 그렇다. 복잡한 것을 가지 쳐 단순화하고 경중을 가려 최선의 공약수를 찾아내는 것이 교육부가 할 일이지 공론을 앞세워 국가교육회의에 숨을 일이 아니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후 지방 공무원들은 정책을 잘 결정하려 들지 않는다고 한다. 위원회를 만들고 거기서 결정하면 그대로 따른다. 욕 먹기 싫고 책임지기 싫어서다. 위원회를 앞세운 방패행정이 이젠 중앙정부로 옮아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thefact@tf.co.kr

원문 출처 [임태순의 길거리 사회학] 주객이 전도된 교육부와 국가교육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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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순의 길거리 사회학] 봄나물 캐기, 계절과 자연이 주는 최상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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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나물 캐기는 돈 안 들고 만족도 최고인 저비용, 고효율의 봄맞이 행사다. 계절과 자연이 주는 최상의 선물이자 평범한 일상 속의 보물이자 보석이다. 이러니 처녀는 물론 어머니, 할머니까지 여심이 나물캐기에 동하지 않을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pixabay
봄나물 캐기는 돈 안 들고 만족도 최고인 저비용, 고효율의 봄맞이 행사다. 계절과 자연이 주는 최상의 선물이자 평범한 일상 속의 보물이자 보석이다. 이러니 처녀는 물론 어머니, 할머니까지 여심이 나물캐기에 동하지 않을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pixabay
봄나물 캐기는 돈 안 들고 만족도 최고인 저비용, 고효율의 봄맞이 행사다. 계절과 자연이 주는 최상의 선물이자 평범한 일상 속의 보물이자 보석이다. 이러니 처녀는 물론 어머니, 할머니까지 여심이 나물캐기에 동하지 않을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pixabay

[더팩트|임태순 칼럼니스트] 강원도 평창으로 내려간 형이 봄나물이 올라있는 어머니 밥상을 사진으로 찍어 가족 카톡방에 올렸다. 보름 전 형 집에 다니러 간 어머니가 한상 차린 것이다. 형은 어머니는 낮에는 집에 있기 갑갑한지 밖으로 나와 근처에서 나물을 뜯는다고 했다. 봄볕을 받으며 나물을 캐는 어머니의 평화로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서울에서 지낼 때에는 아프다는 얘기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평창에 가신 이후론 그런 말씀이 쑥 들어갔다. 아흔이 넘었어도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쉬엄 쉬엄 나물을 캐면 적당히 운동도 돼 절로 건강해지는 모양이다. 밥상은 봄나물로 풍성하지만 조촐하다. 봄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그러나 그 힘은 뜻밖에도 소박함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강원도에 살던 어린 시절 누나를 따라 봄나물을 캐러 간 적이 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그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그 때는 몰랐지만 나이가 들면서 봄 나물 캐기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는 대단한 봄맞이 이벤트라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니 내 나이 여섯 살 아니면 일곱 살이었고 여덟 살 위인 누나는 중학생이었다. 어느 봄 날 아침 동네 친구와 앞산에 나물 캐러 가는 누나를 따라 나섰다. 어떻게 산을 올랐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 덧 산 구릉지에 다다랐다. 긴 겨울을 이겨낸 봄나물이 여기 저기 눈에 띈다. 한 겨울 추위로 모든 것이 꽁꽁 얼었지만 나물은 뿌리를 굳건히 뻗어 땅 속의 자양분을 빨아들이며 버텨낸다. 가히 생명력의 화신이라 할 만하다. 대지가 눅눅해지자 싹을 틔운다. 엄동설한을 이겨낸 봄나물에는 비타민 등 온갖 영양분이 가득하다.

누나와 친구는 쪼그려 앉아 달래, 냉이 등 나물을 캐 바구니에 담는다. 뿌리째 올라온 나물에선 그윽한 향내가 풍겨온다. 두 사람은 나물을 뜯으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물을 다 캐면 자리를 옮긴다. 누나를 따라 다니며 귀찮게 굴던 나는 혼자서 놀다 저 멀리 있는 누나를 보고 달려간다.

하늘은 파랐고 공기는 맑다. 봄 햇살은 따스하고 이따금 봄바람이 불어온다. 주위의 나무는 푸른 기운을 뿜어낸다. 가만히 앉아 먼 산만 바라봐도 기쁘고 힘이 난다. 단순히 나물 캐는 것에서 이런 즐거움과 만족을 맛볼 수 있다니 잘 믿겨지지 않는다.

며칠 전 EBS의 한국기행을 보니 어르신들이 청춘가를 부르며 나물을 캐고 있었다. 동네 친구와 함께 나온 할머니는 “몸은 늙고, 세월은 흘렀지만 봄이 돌아왔는데 어찌 가만 있을 수 있느냐”며 웃음꽃을 터뜨렸다. 나물을 뜯으며 봄도 한 가득 캘 수 있으니 집에만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봄나물 캐기는 돈 안 들고 만족도 최고인 저비용, 고효율의 봄맞이 행사다. 계절과 자연이 주는 최상의 선물이자 평범한 일상속의 보물이자 보석이다. 이러니 처녀는 물론 어머니, 할머니까지 여심이 나물캐기에 동하지 않을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thefact@tf.co.kr

원문 출처 [임태순의 길거리 사회학] 봄나물 캐기, 계절과 자연이 주는 최상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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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순의 길거리 사회학] 일반인들과 사적 교류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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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면 일반인과 경계를 두고 사적인 교류를 하지 마라고 말하는 TV드라마 속 재벌가 어머니 말이 마냥 허구로만 들리지 않는다./픽사베이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면 일반인과 경계를 두고 사적인 교류를 하지 마라고 말하는 TV드라마 속 재벌가 어머니 말이 마냥 허구로만 들리지 않는다./픽사베이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면 "일반인과 경계를 두고 사적인 교류를 하지 마라"고 말하는 TV드라마 속 재벌가 어머니 말이 마냥 허구로만 들리지 않는다./픽사베이

[더팩트 | 임태순 칼럼니스트] 얼마 전 TV 주말 드라마에서 재벌가 어머니가 자신의 회사에 다니는 딸에게 “일반인들과 경계를 두고, 사적인 교류를 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적지 아니 놀랐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짓는 게 과연 저 정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TV를 본 분들은 알겠지만 딸은 어린 시절 미아가 돼 다른 가정에서 자라다 성인이 돼 부모를 찾아 신데렐라처럼 재벌가 딸이 됐다. 그녀는 공교롭게도 부모 회사에 비정규직으로 있다 해고됐으나 부모를 찾은 뒤 복직이 되고, 신분도 정규직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아직 사무실에는 이런 사정을 알리지 않고 일하고 있다. 이를 모르고 딸에게 운전을 시킨 부장을 어머니가 ‘짜르라’고 하자 딸은 ‘부장님은 아직 애도 중학생이고 혼자 벌어서 안된다’고 만류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사원들과 거리를 두라고 한 뒤 “아랫사람 개인사 알아서 좋을 거 없다”며 한마디 더 던진다.

이 장면을 본 뒤 재벌가 자제들이 할아버지, 아버지 회사에 평사원이 아닌 임원으로 직행하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 ‘아, 그래. 평사원으로 들어가면 동료, 상사들과 관계를 맺게 되고 그러다 보면 이런 저런 부탁도 받게 돼 불편할 때가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몇 년 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기업에 다니던 지인은 임원으로 승진해 오너 아들과 해외출장을 가게 됐다. 공항에서 배웅하는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짐을 부친 뒤 단 둘이 남게 되자 오너 아들이 가방을 들라고 했다. ‘나는 너한테 월급을 주는 주인이고 너는 나한테 월급을 받는 머슴이니 가방을 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투였다. 회사에선 그나마 대접을 해줬지만 보는 눈이 없자 ‘주인 의식’이 발동된 것이다.

TV드라마에 나오는 대사 한마디가 재벌가의 행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드라마는 시청률을 의식해 과장하거나 한쪽으로 몰아가 자극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지인의 말도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의 소위 있는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이 두 사례와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대기업에 다녔던 전직 임원도 “오너가들은 우리들은 너희들과 다르다는 일종의 선민의식이 있다”고 공감을 표시했다.

대표적인 게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이다. 승무원이 땅콩 서비스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난 조 전 부사장이 비행기를 회항시켜 승무원을 기내에서 내리도록 한 사건이다. 이 때 그녀의 아버지인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은 “자식 잘못 가르친 책임을 통감한다”며 임원들에게도 ‘왜 나한테 직언을 하지 않았느냐’며 질책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를 믿었으나 그 후 조 회장의 행태를 보면 과연 그가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는 지난해 트위터를 통해 ‘비행기 조종이 차 운전보다 쉽다’고 해 대한항공 조종사들의 자긍심에 상처를 줬고, 최근에는 회사 돈으로 자신의 집을 수리해 경찰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직원이 하는 일을 하찮게 여기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게 아버지나 딸이나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부자는 3대 못간다’는 옛말은 서양에도 있다. 아라비아의 역사학자 이븐 할둔은 역사서설에서 ‘명문(名門)은 4대(代) 만에 종말에 이른다’고 했다. 그는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자신의 노력을 아들에게 가르치지만 경험을 통해 배운 것과 공부해서 배운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고 그런 점에서 아들은 아버지에 비해 뒤떨어진다”고 했다. 또 “3대에 가면 단지 모방과 전승에 그쳐 더 처지게 되고 4대는 혈통으로 주어진 가문의 영광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 모든 면에서 선조들에게 뒤떨어진다”고 했다.

우리나라도 최근 삼성, 현대 등 재벌가의 3, 4세 경영이 본격화되고 있다. 경영은 간단히 말하면 사람을 잘 부려서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성원의 능력을 잘 파악해 거기에 맡는 일을 시켜 많은 이익을 올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직원들과 더욱 가까워지고 소소한 것도 알아야지 ‘나는 그들과 다른 별세계에 태어났다’며 선을 그어선 회사를 잘 운영할 리 없다. 또 그런 선민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노사화합을 이뤄 성과를 창출할 수도 없을 것이다.

혈통을 앞세워 직원들에 군림하려는 자세를 가진 3, 4세 경영인은 경영에 참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자수성가한 1세대 경영인을 만나면 백전백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thefact@tf.co.kr

원문 출처 [임태순의 길거리 사회학] 일반인들과 사적 교류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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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순의 길거리 사회학] 나이 든 친구, 이름 부르기 곤란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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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수학한 학교 친구들은 편하게 부담 없이 만날 수 있어 좋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손자까지 둔 친구에게 계속 이름을 부르는 것은 불편하다. 서로의 격을 높일 수 있는 호가 필요한 이유다./더팩트DB
동문 수학한 학교 친구들은 편하게 부담 없이 만날 수 있어 좋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손자까지 둔 친구에게 계속 이름을 부르는 것은 불편하다. 서로의 격을 높일 수 있는 호가 필요한 이유다./더팩트DB
동문 수학한 학교 친구들은 편하게 부담 없이 만날 수 있어 좋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손자까지 둔 친구에게 계속 이름을 부르는 것은 불편하다. 서로의 격을 높일 수 있는 호가 필요한 이유다./더팩트DB

호(號)가 필요한 시대

[더팩트 | 임태순 칼럼니스트] 관동별곡을 쓴 조선시대 문인 정철의 이름 앞에는 송강(松江)이 따라붙는다.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의 이름 앞에도 백범(白凡)이 빠지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본명과 호가 바늘과 실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특히 백범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머리가 아니라 발이 되겠다는 그의 낮은 자세가 담겨 있어 머리가 숙여진다.

학창 시절 ‘옛날 사람들은 왜 이름을 여러 개 가져 수험생들을 괴롭게 만들까’라는 생각을 했다. 유명한 사람들의 호나 자(字)를 묻는 문제가 시험에 종종 출제돼 암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의 업적 챙기기도 바쁜데 호나 자까지 외워야 하니 이만 저만 성가신 게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서 학창 시절 친구들과 다시 만나게 된다. 한창 사회생활을 할 때는 바빠서 얼굴을 볼 수 없었으나 이제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동문 수학한 학교 친구들은 편하게 부담 없이 만날 수 있어 좋다. 머리가 벗겨지거나 반백인데도 서로 이름과 별명을 부르거나 "야" "자"하기도 한다. 심하면 "이놈" "저놈" 쌍소리를 해도 얼굴을 붉히지 않는다.

어린 시절 학교라는 공간에서 추억을 쌓으면서 정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그만 둔 뒤에도 직장동료들을 만나며 이야기를 나눈다. 회사생활이라는 공통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장동료들을 만날 때에는 호칭이 학교 동창들만큼 편하지는 않다. 나이가 있으니 이름을 부르기는 뭣해서 김 국장, 이 실장, 박 이사 등 직장에서의 최종 직책으로 부른다.

완연한 가을 날씨가 계속 되면서 어릴 적 친구들과 등산을 하는 인구가 늘고 있다. 반백의 나이대에선 과거 직장 동료나 학교 동창들의 이름과 직급을 부르는 것보다 '호'를 만들어 부르면 더 존중받는 것 같아 좋을 것 같다./속초=임세준 기자

또 직책이 서열 또는 상하관계를 나타내 불편하다고 해서 성 뒤에 공(公)을 붙여 김공, 이공, 박공하며 공대하기도 한다. 그런데 학창 시절 친구들도 처음에는 아무렇게나 부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선뜻 이름이나 별명 등으로 부르기가 어려워진다. 아무리 친한 동창이라도 어엿한 한 집안의 가장인데다 개중에는 자녀들을 출가시켜 할아버지가 된 친구도 있어 이름만을 부르기가 멋쩍다.

나이가 든 어른인 만큼 뭔가 대접해주고 존중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 어머니들도 자식이 결혼하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아범’이라 하지 않았던가. 특히 사장, 총장, 장·차관 등 높은 직책에 오른 사람은 좀 신경이 쓰인다. 우리 조상들은 스무살이 되면 성년식을 치르고 관례를 주관하는 어른이 자를 지어주었다. 즉 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붙여준 성년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이에 걸맞는 이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름의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자의 전통은 거의 사라진 듯하다. 이름이 좋지 않다고 해 개명한 사람은 봤어도 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다.

이에 반해 호의 전통은 아직 남아 있다. 호는 본인 또는 스승이나 친구들이 지어주는 별칭으로 특히 글을 쓰는 문인들 사이에선 이름과 호가 함께 쓰이고 있다. ‘국화 옆에서’를 쓴 서정주 시인은 ‘미당’(未堂), 청록파 시인 박영종은 ‘목월’(木月)로 본명보다 호가 널리 알려졌다. 아무리 동년배라도 나이가 들면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 어려워진다. 이럴 때 이름 대신 호로 부르면 편하고 한결 운치가 있어 보인다.

이제 우리나라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어 100세 시대라는 말이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누구나 다 긴 노후를 맞게 된다는 말인데 노후에 부르는 이름 하나 쯤은 있어야 할 것 같다. 대화가 상대편을 부르면서 시작되는데 맞춤한 호칭이 없어 출발부터 꼬이면 대화가 잘될 리 없다. 노후에 자신을 부르는 별칭으로는 호만한 것이 없을 것 같다. 호뒤에 선생을 붙이면 누구나 다 편하게 부를 수 있고 당사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현직을 떠난 지 10, 20년이 지난 사람에게 옛날 직책을 붙여 부르는 것은 과거의 향수에 매달린 것 같아 보기에 좋지 않다.

내 호는 태백이다. 고향에 있는 산 이름을 따서 붙였다. ‘태백’ 또는 ‘태백선생’. 부르는 사람도 편하고 나 역시 대접받는 기분이어서 좋다.

thefact@tf.co.kr

원문 출처 [임태순의 길거리 사회학] 나이 든 친구, 이름 부르기 곤란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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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순의 길거리 사회학] 이승엽 은퇴 단상, 노력의 배신도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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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좌우명으로 국내 프로야구계에 큰 족적을 남긴 국민타자 이승엽. 2017시즌 은퇴를 앞둔 마지막 올스타전에서 구본능 KBO총재(왼쪽)의 꽃다발을 받고 있다./더팩트DB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좌우명으로 국내 프로야구계에 큰 족적을 남긴 국민타자 이승엽. 2017시즌 은퇴를 앞둔 마지막 올스타전에서 구본능 KBO총재(왼쪽)의 꽃다발을 받고 있다./더팩트DB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좌우명으로 국내 프로야구계에 큰 족적을 남긴 '국민타자' 이승엽. 2017시즌 은퇴를 앞둔 마지막 올스타전에서 구본능 KBO총재(왼쪽)의 꽃다발을 받고 있다./더팩트DB

[더팩트 | 임태순 칼럼니스트] 이승엽 선수가 1997년 말 또는 98년 초 삼성야구단 관계자들과 함께 필자가 근무하던 신문사를 들렸다. 프로야구 페넌트레이스 MVP(최우수선수상)를 수상한데 대한 감사 인사를 온 것이다. 그는 체육부원들에게 장 지갑을 하나씩 돌렸다. 지갑에는 천 원 지폐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지갑도 고마운데 돈까지 들었다’고 하자 야구 담당 선배기자는 “지갑을 선물할 때는 빈 채로 주지 않는다”며 “지갑을 채우라는 의미로 뭔가를 넣어서 준다”고 설명했다. 이 말을 듣고 ‘나이에 비해 참 생각이 깊다’라는 기억이 오래도록 남았다.

그후 그는 승승장구했다. 인성뿐만 아니라 실력도 출중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홈런왕이 된 뒤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 명문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4번 타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추석 전날인 지난 3일에는 그의 은퇴경기가 열렸다. 그는 마지막 경기에서도 연타석 아치를 그리며 팬들에게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추억을 선사했다.

이날 경기를 중계한 TV를 보니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글이 자주 비쳤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짐작한대로 그의 좌우명이었다. 원래 선배 양준혁 선수의 모토였는데 이승엽 선수가 이어받았다고 했다. 그가 한 시즌 홈런 56개, 프로야구 통산 홈런 467개 등 대기록을 남기고 은퇴하게 된 것도 노력이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글귀가 자꾸 눈에 밟혔다. ‘과연 노력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그의 좌우명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우리 사회는 지나칠 정도로 ‘노력하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신화에 빠져 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고진감래’(苦盡甘來),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격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승엽 선수의 좌우명이 교과서에 실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올림픽 은메달을 따고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지나친 성적 지상주의가 낳은 결과다. 노력은 하되 과정과 결과를 분리해서 보는 자세가 아쉽다. 사진은 2016리우올림픽 선수단의 귀국 장면./더팩트DB

그러나 세상일이 노력한다고 해서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선 노력해도 안 되는 게 더 많다. 그런데도 우리는 노력하면 성취하게 되고 성취하지 못한 것은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더욱 노력하라고 다그친다. 그러나 ‘노력=성취’ 등식을 맹신하게 되면 우리 자신이 피곤해지고 불행해진다. 노력해서 안 되면 괴롭고 좌절감을 맛본다. 또 성취하지 못하면 상심하고 실망하게 된다. 좌절하고 실망하는 사람이 행복하기란 쉽지 않다.

철학자인 탁석산 씨는 ‘준비가 알차면 직업이 즐겁다’라는 책에서 ‘노력지상주의’를 경계했다. “우리는 노력을 강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특히 입시가 있는 중고생에게는 노력하지 않으면 일류 대학에 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공부를 못 하거나 좋은 대학에 못 가는 사람은 노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성실성마저 의심받는다. 이런 분위기는 대학과 사회까지 이어져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물론 본인의 노력이 공부나 일의 성취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맞지만 이런 생각에 전적으로 지배당하면 곤란하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노력해서 성공하기도 하지만 노력해도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왜 우리는 노력지상주의에 경도돼 있을까. 아마 성장, 성공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결과를 중시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목표를 정한 뒤 노력해서 달성하고 또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는 것에 익숙해왔다.

이를 통해 많은 것을 얻기도 했지만 잃은 것도 많다. 경주마처럼 목표 또는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땀을 흘리는 과정의 아름다움, 소중함을 몰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나쁘면 모든 게 소용이 없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선수들이 우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4위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돌이켜보면 4위는 물론 10위도 대단한 것 아닌가.

이제는 노력은 하되 과정과 결과를 분리해서 보자. 절대 노력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단지 땀을 흘리되 결과에 집착하거나 연연해하지 말자는 것이다. 땀 흘렸는데 결과가 좋지 않으면 마음의 상처를 받고 스스로가 무능하게 보인다. 이 얼마나 비참한가.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씨는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라는 책에서 “모든 결과는 과정이 있어야 가능한데 이 땅의 사내들은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면서 “대한민국의 남자들은 오직 결과만 가지고 비교하고 과정이 생략된 삶을 사는 까닭에 불안하다”고 꼬집었다.

설령 노력이 배신한다고 해도 실망하지 말자. 노력의 배신에 우리는 더 강해지고 더 많은 것을 배우지 않는가. 과정으로서의 노력을 사랑하자. 아마 이승엽 선수도 노력에 배신당하며 더욱 성장하지 않았을까.

thefacr@tf.co.kr

원문 출처 [임태순의 길거리 사회학] 이승엽 은퇴 단상, 노력의 배신도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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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순의 길거리 사회학] 트럼프와 리용호 '막말', '개소리'에서 '반려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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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완전 파괴하겟다고 하자 북한은 개소리라고 맞받아쳤다. 개는 이제 반려견의 위치까지 격상되며 소통의 촉매제가 되고 있지만 미국과 북한 관계에선 극단으로 치닫는 매개체로 인용되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제공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완전 파괴하겟다고 하자 북한은 개소리라고 맞받아쳤다. 개는 이제 반려견의 위치까지 격상되며 소통의 촉매제가 되고 있지만 미국과 북한 관계에선 극단으로 치닫는 매개체로 인용되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제공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완전 파괴하겟다'고 하자 북한은 '개소리'라고 맞받아쳤다. 개는 이제 반려견의 위치까지 격상되며 소통의 촉매제가 되고 있지만 미국과 북한 관계에선 극단으로 치닫는 매개체로 인용되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제공

‘개’, ‘개소리’ 또는 ‘대화의 촉매제’

[더팩트 | 임태순 칼럼니스트]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극언에 대해 북한이 어떻게 응수할지 내심 궁금했다. 평소 거친 말을 쏟아내고 자존심 강한 북한이 가만히 있지 않으리란 것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 해답은 ‘개’였고, 이를 보고 ‘역시나’란 생각이 들었다.

유엔 총회 참석차 미국 뉴욕에 온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트럼프 대통령의 ‘북한 완전 파괴’ 발언에 대해 기자들이 묻자 “개 짖는 소리”라며 일축했다. 그는 “‘개는 짖어도 행렬은 간다’는 말이 있다”며 “개 짖는 소리로 우리를 놀라게 하려 생각했다면 그야말로 개꿈”이라고 깔아뭉갰다.

‘개는 짖어도 행렬은 간다’라는 말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개의치 않고 내 길을 가겠다”는 뜻으로, 미국 작가 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등장하는 “개가 짖어도 행렬은 나간다(The dogs bark, but the caravan moves on)”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개를 가까이 했지만 귀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근 반려견을 키우는 인구가 많아지면서 개를 통해 모르는 사람과도 소통하는 일이 많아져 개 위상은 많이 높아졌다./ 더팩트DB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개를 가까이 했지만 귀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집 밖에 묶어두고 마구 키웠으며 여름철에는 보신 음식으로 먹을 정도로 푸대접을 했다. 그래서인지 개와 관련된 말은 많지만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리용호가 ‘개소리’ ‘개꿈’ 등 ‘개’로 한방 먹인 것도 이런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 ‘개 팔자가 상팔자’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 처럼 속담에 나오는 개에는 약간 깔보는 마음과 조롱이 담겨 있다. ‘개소리’처럼 개와 관련된 조어로 넘어가면 이미지가 더 좋지 않다. 우선 떠오르는 게 욕이다. 욕의 대명사인 ‘개☓☓’는 말할 것도 없고 남녀 앞에 ‘개’가 붙으면 ‘개놈’ ‘개년’ 등 쌍소리가 된다. 또 단어 앞에 ‘개’가 붙으면 ‘질이 떨어지는’ ‘헛된’ ‘쓸데없는’ 등의 뜻이 돼 나쁜 의미의 접두사로 애용된다.

어지럽고 무질서하고 난잡한 모습을 ‘개판’이라고 하고, 상대편이 헛된 꼼수를 부리는 것을 ‘개수작’이라고 한다. 헛된 꿈은 ‘개꿈’이고, 살구에 개가 붙으면 질이 떨어지는 ‘개살구’가 된다. ‘개나발’, ‘개차반’이란 말도 있다. 리용호의 ‘개소리’ ‘개꿈’이 어떻게 영어로 옮겨졌는지 살펴보지 않았지만 이런 비하하고 천대하는 감정까지 담겨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에 반해 서양에서는 개가 대접을 받아 아끼고 가지고 노는 ‘애완동물’이다. 얼마 전부터 우리나라도 이 대열에 뛰어들어 ‘개’의 지위는 ‘애완’에서 삶을 함께 하는 ‘반려’의 단계로 격상됐다. 이에 걸맞게 대우나 처우도 좋아져 개가 죽으면 ‘노제(路祭)’를 지내기도 한다고 한다.

견공들이 사랑을 받는 것은 10만년 넘게 인간과 함께 살아오면서 어떤 동물보다도 더 사람의 마음을 잘 알고, 읽기 때문일 것이다. 즉 교감, 공감능력이 뛰어나다는 말이다. 개들은 몸짓으로 감정을 표현해 주인과 의사소통을 한다. 주인이 하품을 하면 따라 할 정도다. 개는 또 정직하다. 개를 키워 본 사람들은 개가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을 몸으로 느낀다. 사람 간 교류와 접촉이 적어져 점점 소외되고 단절되는 불통의 시대에 주인의 마음을 알아주고 말벗이 되어주니 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동네 공원에 가면 반려견 시대라는 걸 실감한다. 많은 사람들이 개를 끌고 나와 산책을 하는데, 대화의 촉매제가 되는 것이 개다. 서로 모르는 사람도 오가다 개와 마주치면 상대편 개의 상태, 습관 등을 물으며 오랜 친구인 것처럼 이야기 한다. 공통의 관심사가 있으니 대화가 술술 풀린다. 트럼프와 김정은도 개를 키우면 조금이라도 대화가 통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돌아가는 판세를 보니 아무래도 그건 ‘개소리’나 ‘개꿈’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thefact@tf.co.kr

원문 출처 [임태순의 길거리 사회학] 트럼프와 리용호 '막말', '개소리'에서 '반려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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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순의 길거리 사회학] 굿바이! 어머니의 ‘남존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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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은 귀하고 남의 딸은 귀하지 않다’는 어머니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은 균형을 이루기 어렵다. 사진은 가족친화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는 KT&G./KT&G 제공
‘내 아들은 귀하고 남의 딸은 귀하지 않다’는 어머니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은 균형을 이루기 어렵다. 사진은 가족친화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는 KT&G./KT&G 제공
‘내 아들은 귀하고 남의 딸은 귀하지 않다’는 어머니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은 균형을 이루기 어렵다. 사진은 '가족친화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는 KT&G./KT&G 제공

[더팩트 | 임태순 칼럼니스트]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높고 여자는 천하다는 뜻으로, 남성 중심의 전통적인 유교관이 반영된 말이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진출이 확대되고 지위가 향상되면서 남존여비의 의미도 퇴색되고 있다. 대신 세태가 반영된 새로운 ‘남존여비’가 많아지고 있다. 인터넷을 보니 ‘남존여비’ 건배사가 인기라고 한다. 송년회에서 건배사로 이 말을 선창하면 여성들이 ‘우’ 하며 야유를 퍼붓다 “남자의 존재는 여자의 비위를 맞추는데 있다”고 하면 환호로 바뀐다고 한다.

내가 알고 있는 ‘남존여비’는 ‘남자의 존재는 여자한테 (살살) 비는데 있다’라는 뜻이다. 20여 년 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로, 점점 아내의 위세에 눌려 지내는 공처가들의 현실을 애교있게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는 “힘이 있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 죽어 지낸다”는 남편들의 허풍 또는 애교도 담긴 듯 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부부관계를 빗댄 좀 야한 ‘남존여비’도 있지만 생략한다.

신종 ‘남존여비’가 쏟아지는 것은 남성 우위의 남녀 관계가 동등하거나 양성평등으로 균형추를 맞춰가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새로운 ‘남존여비’는 전통적인 남존여비의 뜻을 극적으로 반전시키는 재미도 있다. 건배사 남존여비처럼 나 역시 내가 아는 남존여비로 힘든 상황을 넘기거나 분위기를 바꾼 적이 한두 번 있다.

몇 년 전 사촌 형이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해 병문안을 갔다. 호스피스는 말기 암 환자들이 치료 대신 통증을 완화하며 지내다 임종하는 곳이다. 사촌 형 역시 예순의 많지 않은 나이였지만 말기 암이어서 이 곳에 가게 됐다. 회복 불능인 환자를 위문해야 하는 힘든 자리여서 동생 부부와 함께 찾아뵀다. 승용차를 몰고 가면서도 무슨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고민했지만 뾰족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빨리 완쾌해야 한다’거나 ‘힘내라’라는 일상적인 인사말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죽음 대기소’여서 어둡고 착 가라앉아 있을 것으로 여겨졌던 호스피스 병동은 예상과 달리 밝고 제법 활기찼다. 여기저기서 찬송가 소리가 들리고 간호원, 의사들도 분주히 움직였다. 비록 생을 얼마 남겨두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오는 곳이지만 여기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며, 아무리 시한부 인생이라도 죽기 전까지 삶은 계속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분위기에 마음이 누그러져 자연스럽게 인사말을 건넸다. 그리고 “병수발을 들고 있는 형수한테 잘 하라”면서 “‘남존여비’가 무슨 뜻인 줄 아느냐”고 농담을 던졌다. 남자가 우위라는 말 아니냐는 그에게 요즘은 그런 뜻이 아니라면서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자 사촌형은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난 그렇게 비굴하게 살지 않겠다”며 호기를 부렸다. 뜻하지 않은 ‘남존여비’ 논쟁으로 우리들은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는 까맣게 잊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중에 형수한테 들은 이야기지만 그는 실은 암 투병생활을 하면서 ‘고생만 시키고 함께 해외여행 한 번 가보지 못해 미안하다’며 고백을 했다고 하니 동생들 앞에서 허풍을 떤 것이다.

얼마 전 질녀 결혼식이 있었다. 폐백을 받으면서 작은 아버지로서 뭔가 덕담을 해야 할 텐데 고민하다 불쑥 ‘남존여비’가 무슨 말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순간 신랑이 어리둥절해 하고, 폐백을 도와주던 아주머니도 ‘요즘 분위기에 맞지 않게 웬 생뚱맞은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신랑에게 뜻을 설명해주고 항상 ‘신부에게 살살 빌면서 살라’고 하자 폐백장에 웃음꽃이 ‘팡’ 터졌다.

며칠 전 찜질방에서 중년 여성들의 대화를 듣게 됐다. 불가마에서 땀을 빼고 있는데 50대 초반의 여성이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요리를 배우고 있는데 맛난 음식을 해줘 아주 예뻐 죽겠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아들이 결혼해 아내에게 음식을 해 갖다 바치면 그런 꼴은 못 볼 것 같다”면서 옆 사람의 동의를 구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남존여비란 말인가. ‘내 아들은 귀하고 남의 딸은 귀하지 않다’는 뜻 아닌가.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구닥다리 남존여비의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아무래도 사회 분위기에 어울리는 남존여비가 정착되려면 어머니들부터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다. 어머니가 아들과 사위, 딸과 며느리를 차별하지 말고 내 자식처럼 똑같이 공평하게 대해주면 사위와 장모, 며느리와 시어머니간의 갈등과 분란이 없어질 것이다. 내 아들은 누군가의 사위가 되고, 내 딸은 누군가의 며느리가 된다. 어머니의 ‘남존여비’가 균형을 맞춰야 진정한 남녀평등이 이루어지고 가정도 잘 굴러가지 않을까.

thefact@tf.co.kr

원문 출처 [임태순의 길거리 사회학] 굿바이! 어머니의 ‘남존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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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순의 길거리사회학] 디지털 시대의 신 문맹, 실행키부터 누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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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교육이 잘 보급돼도 문맹자는 생길 수밖에 없다. 선행학습의 부작용으로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 중에 한글을 모르는 학생이 꽤 있다고 한다. 사진은 몇 년 전 평생교육원이 주최한 문해교사 대회 장면./임태순 칼럼니스트
아무리 교육이 잘 보급돼도 문맹자는 생길 수밖에 없다. 선행학습의 부작용으로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 중에 한글을 모르는 학생이 꽤 있다고 한다. 사진은 몇 년 전 평생교육원이 주최한 문해교사 대회 장면./임태순 칼럼니스트

아무리 교육이 잘 보급돼도 문맹자는 생길 수밖에 없다. 선행학습의 부작용으로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 중에 한글을 모르는 학생이 꽤 있다고 한다. 사진은 몇 년 전 평생교육원이 주최한 문해교사 대회 장면./임태순 칼럼니스트

[더팩트 | 임태순 칼럼니스트] 몇 년 전 평생교육원이 주최한 문해(文解)교사 대회를 둘러본 적이 있다. 문해교육이란 말 그대로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한 교육이다. 솔직히 행사 참관 전에는 과연 요즘에도 문해교육이 필요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의무교육의 실시로 한글을 모르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사를 지켜본 뒤 이런 선입견은 크게 바뀌었다. 아무리 교육이 잘 보급돼도 문맹자는 생길 수밖에 없고, 또 사회 변화로 문맹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 중 한글을 모르는 학생이 꽤 있다는 언론보도를 기억할 것이다. 선행교육의 부작용으로, 한글을 배우지 않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정작 학교에서는 한글 가르치는 것을 건너뛰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또 우리 사회가 다문화 사회로 접어든 것도 문해교육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글이 서툰 베트남, 필리핀 등 동남아 이주 여성들은 본인은 물론 2세를 위해서도 문해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이와 함께 교육방식도 디지털 시대에 맞게 융‧복합화 되면서 쉽고 재미있게 진행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교재를 보니 한글과 한자, 영어가 섞여 있어 한글, 한자, 영어를 통합적으로 배우도록 돼 있었다. 일례로 한자로 입 ‘구’(口), 눈 ‘목’(目)을 쓰면서 한글과 한자를 동시에 배우고, 한글로 ‘집’을 쓰면서 영어로 ‘house’ ‘home’을 발음한다. 우리들이 실생활에서 한글 외에 영어와 한자를 혼용해 많이 쓰고 있으니 이런 멀티 교육법은 상당히 효과적일 것이다.

얼마 전 만난 어르신은 ‘나는 까막눈이야’라는 말을 했다. 신문을 봐도 온통 모르는 단어투성이어서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직 언론인도 “평생 신문사 밥을 먹은 나 같은 사람도 요즘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통 알 수 없다”고 비슷한 말을 했다.

'디지털 시민시장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6월 세계 최초로 디지털 시민시장실을 구축했다며 시연을 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변화상을 보여준다./더팩트DB “G메일로 어디서든 이메일을 확인할 수 있고 드롭박스(자료를 저장하는 애플리케이션으로 한 번 설치하고 로그인해두면 어디서 수정 작업을 하든 모든 컴퓨터에서 그 폴더 안의 자료가 같은 상태로 보관된다)같은 클라우드 스토리지에 파일을 저장하면 어디서든 파일을 열어 작업할 수 있다.…회의는 스카이프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할 수 있다.” 어느 책에 나오는 내용인데 컴퓨터를 잘 모르는 사람이면 ‘드롭박스’, ‘클라우드 스토리지’, ‘스카이프’ 등은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신문이나 방송을 봐도 생소한 용어가 적지 않다. 이런 현상이 심해지면 나 역시 곧 문맹자가 되고 말 것이다.

신종 문맹자가 등장하게 된 것은 과학기술의 진보로 사회변화 속도가 무척 빠르기 때문이다. 컴퓨터에 들어가는 메모리 칩의 성능이 18개월만에 두 배로 늘어난다는 ‘무어의 법칙’이 이를 말해준다. 컴퓨터 성능이 1년 반 사이에 두 배로 향상된다는 것은 정보저장용량이 두 배로 커졌다는 것을 말하며, 뒤집어 얘기하면 배워야 할 새로운 정보나 지식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은 1년에 두 배씩 메모리 반도체의 집적도가 늘어난다는 '황의 법칙'을 넘어 '5G 시대'를 앞두고 있으니 기술의 발전 속도는 그야말로 눈부시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오죽했으면 네이버에 매일 ‘상식’난이 뜰 정도가 됐을까.

하루가 다르게 신종용어가 쏟아지는 디지털, 정보화 사회에서 문맹은 숙명일 수밖에 없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맞닥뜨리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신 문맹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부지런히 배우는 것 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세계적인 경영인 잭 웰치는 GE회장으로 있을 때 이런 말을 했다. “간편하지 않으면 빨라질 수 없고 빨라지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아무리 제품의 성능이 좋아도 작동이 느리면 팔리지 않는다. 당연히 가장 단순하고 쉽게 조작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문해교육도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돼 있는 것을 앞에서 보지 않았는가. 교육방식은 물론 제품 조작법도 간편하고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돼 있다는 말이다. 오늘부터 엔터 키를 눌러보자. 아니 당장 실행 키를 눌러라.

thefact@tf.co.kr

원문 출처 [임태순의 길거리사회학] 디지털 시대의 신 문맹, 실행키부터 누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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